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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괴감

 
술도 들어가고
시간은 1시를 넘어 달리는데
자괴감, 자괴감, 이 자괴감은 어찌할 것이냐.

만나고 헤어지면 또 보고 싶은데, 배려와 불안은 섞여들며 갈피를 못잡겠고, 그렇게 가슴 떨리는 상대가 아님에도 말 없이 가만 있는자의 생각없는 권력에 알면서도 휘둘리는 어리석음은 대체 누굴 탓해야 하는가. 그냥 말 없이 확 가만 있을까 보다. 제길. 그러나 저러나 지금 드는 자괴감은 어찌할꼬... 내일 아무일도 안하고 쉬고 싶은 마음 뿐이구나.

by 불안정한神 | 2008/04/28 01:06 | 트랙백 | 덧글(0)

하고픈 일.

 
학교 벚꽃 구경 후 산책, 내려와 만화방.

레이디 멕베스 관람, 분수 구경.

에버랜드.

호수공원 산책, 맛있는 거 먹고 한강변 드라이브.

유리 동물원 관람, 삼청동.

대관령 양떼 목장.

서울 근교 바닷가.(강화도나 석모도 ok)

by 불안정한神 | 2008/03/23 23:24 | 트랙백 | 덧글(0)

[일드] 라이어 게임 : 천재 사기꾼, 멍청할 정도로 착한 아이라는 설정의 여자아이의 짜릿한 두뇌 게임.

 

라이어 게임.

 

라이어 게임이라는 일드를 보았다. 2007년 상반기인가, 후지 tv에서 방영된 작품으로 상반기 드라마 중에서는 가장 볼만하다는 평을 듣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애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그 설정의 독특함이었는데, 처음에는 만화책으로 보려고 하였으나 3권 이상 구하기가 쉽지 않고 여차저차하던 차에 드라마는 완결되었다고 하길래 결국 보게 되었다. 

일단 드라마를 보면서 만화책과 비교해 본 결과, 만화책보다 드라마가 연출면이나 표현면이나 월등히 잘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뭐 만화라고 해봤자 1권 처음 조금 깨작이다 말아서 제대로 된 비교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실 분들은 드라마 쪽이 훨씬 생동감있고 재미있을 거란 생각은 든다. 

이 드라마에는 칸자키 나오라는 바보같을 정도로 착하고 정직한 여자아이와 신이치 아키야마라는 비정상적으로 냉철하고 머리 회전이 빠른 천재 사기꾼 남자아이가 등장한다. 라이어 게임이란 것은 정체불명의 집단이 무작위(는 아니지만)로 선정된 플레이어들에게 1회전엔 1억엔(대충 8억이다!) 2회전 1억엔, 3회전 5억엔 하는 식으로 일정 액수의 돈을 나누어 주고 서로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나는 상대방을 죽이고 뺏는 것이 가장 간단한거 아닌가 싶었는데, 뭐 그런 과격한 놈은 없두만. 일단 여기서의 어떤 수단이라 함은 '어떠한 거짓말을 하더라도'라는 말로 바꿔 읽어주시면 되겠다) 상대방의 돈을 뺏는 게임을 하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 또는 시일이 지나 게임이 종료되면 애초에 자신에게 공급되었던 1억엔 등은 고스란히 반환하여야 하고 자신이 뺏은 돈은 자신의 상금이 되는, 돈을 뺏긴자는 그만큼의 빚을 고스란히 지게 되는 공포의 게임! 그것이 라이어 게임이다.  

여차저차해서 이 게임에 (숙명적으로, 계획적으로) 휘말린 주인공 두 명은 비현실적환상적어처구니없을정도로 착하다 못해 멍청한 (죽어도 순진하다는 말을  써주고 싶지 않다) 여주인공과 역시 비현실적환상적어처구니없을정도로 냉철하고 머리 회전이 빠르고 완벽한 계산을 하는 남자주인공은 차근 차근 이 집단의 의도를 파헤치기 위해서 올라가게 된다. 

일단 드라마 자체의 재미를 놓고 이야기하자면 재미있다. 보는 동안 내가 저 상황이라면 저 게임을 어떻게 이겨야 할까, 일종의 두뇌싸움을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뭐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은 충분한 사고의 시간이 주어짐에 반해 나는 휙휙 지나가는 화면을 따라가게 되다 보니 제대로 된 전략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아키야마가 멋진 해결책을 내어 놓으면 ' 내 한계는 여기까지인가. 털썩 ' 류의 기분을 느끼며 살짝 좌절하게 된다는 단점을 제외하면 말이지만.

아직 결말은 보지 못해 어떻게 끝나는지는 모르지만 ( 이 드라마가 참 특이하고 웃긴게, 한 편단 대충 35분쯤 되는데 그런 것이 10편, 마지막 편이 한 2시간 20분쯤 된다. 거의 4편 분량. 이건 뭐.) 일단 지금까지는 '세상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로 나뉘어 진다.' '속는 놈이 바보지 아하하하하하하.' '세상은 뺏는자와 뺏기는 자로 나뉘어 진다. 우하하하하.'와 같은 철저한 이분법적 세계관에 대항하여 '우리 모두 평화롭게, 다 같이 행복한 삶을 살아요. 모두 힘을 합쳐 협력해서. 피스(peace).' 류의 태도를 가진 여주인공이 대립하는 구도에 천재 사기꾼 아키야마가 여주인공의 두뇌 노릇을 해주는 내용이 진행되었다. 방금 말한 이분법적 사고는 비단 이 드라마에서 처음 본 것은 아니다. 가장 적나라하게 저것이 드러나는 것은 '도박묵시록 카이지'. 두 작품의 결정적 차이라면 도박묵시록 카이지에는 나오 같은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분법적 세계관이 그 만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세계관이다. 주인공 카이지는 그러한 세계에서 한마리 진흙개가 되어 손에 닿지도 않는 곳에 안전하게 앉아서 자신을 농락하는 세력의 손길로부터 살아남으려 발버둥친다. 아니, 단지 살아 남으려는 발버둥을 넘어서 그런 어이없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벌어지는 도박의 짜릿함, 숨막힐듯한 긴장이라는  부(負)의 생명 에너지에 환희하면서. 그러나 이 드라마에는 나오가 있다. 결말은 안 봐서 모르겠지만 복수심에 불타는 아키야마(개인적 과거 때문에 이 사람의 사고는 이분법적 세계관에 가깝게 변해있을지 모르나 그의 어머니는 나오와 거의 같은 캐릭터였기 때문에 근본은 나오와 같다는 설정이 아닐까 추측된다)와 끝까지 게임에서 살아남은 후 나오식 peace한 세계관을 폭죽처럼 파팡 터뜨리며 끝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나오의 행동을 보면서 짜증이 불쑥 불쑥 치밀어 올랐다. 뭐 나오가 생각하는 것은 대충 이런건데, 모두에게 1억씩 나눠주고 서로의 것을 뺏으라고 한다면 모두 남의 것은 탐하지 않고 있다가 고스란히 반납하는 거야. 그러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해피해피, 너무나 행복해요. 아무도 절망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의 나날로 고고싱. 이건 뭐, 유토피아도 아니고. 철저하고 공정한 룰이(국가와 법 같은 체제가 되었건, 허튼 짓을 하면 가시가 돋아 그런 생각을 한 주인을 죽여 버리는 인공 심장이 되었건간에) 그러한 짓거리를 원천 봉쇄한다면야 불.가.능.하니까 나오와 같은 생각도 가능하겠지만, 뭐 현실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말이지. 2명의 인간만 결합해도 서로의 속을 모른다. 수 많은 연인들은 서로를 배신하고, 수 많은 동업자도 서로를 배신하고 수 많은 부부들은 이혼을 한다. 그런 세상에 3명, 4명. 숫자가 불어날 수록 있을 수 없지 그런 일 같은건. 사실 솔직한 것은 카이지 같은 태도가 아닐까 한다. 그 놈은 일단 구제불능 도박 중독자기 때문에 항상 너무 극한 상황속에 있어 우리의 일상 생활과 단순비교하긴 어렵겠지만, 결국에 '나는 지배자가 되어야 해' '나는 피지배자가 될 수 없어' '나는 뺏는 자가 되어야 해.' '나는 빼앗기는 자가 될 수 없어.' 라는 명제를 신념으로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이 현재의 현실을 상당부분 반영하는 것만은 틀림없으니까. 누가 피지배자가 되고 싶고 뺏기는 사람이 되고 싶겠는가. 문제는 두 계급중 어느 것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그러한 현실을 인식하되 자신은 뺏는자, 지배자 라는 계급에 존재할지라도 최소한, 전형적인 그들의 행동양식을 카피하지는 않는 것, 그리고 빼앗기는자, 피지배자 라는 계급에 존재할지라도 .... 존재할지라도 ... 존재할지라도 ... 참 쓸 말이 없다. 이 문장은 끝맺을 수가 없다. 뭐 단순히 이랜드, 홈에버 사태만 봐도 그렇지. 그 계급에 위치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기가 힘들다. 선택하는 방법이라곤 역시 투쟁. 투쟁. 그러나 그 투쟁은 국가마저 개입을 포기한 상황에선 악덕 기업의 배째라식 배짱에 혹독한 고난을 겪게 된다. 결국 특정 계급적 존재가 되기를 욕망하기 보다는 계급이 존재하는 상황을 어떻게 좀 더 바람직하게 변화시켜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여야 하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이는데, 나오양 같은 태도는 도움이 안된단 말이지. 너무 이상적이라 그렇다. 이상사회를 그리는 것도 궁극의 목표를 제시하므로 좋아, 라면 할 말은 없지만 역시 그런 말은 어이없지.(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구나. 그건 너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훨씬 멋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거의 모든 형태를 이야기했다!) 

아니 뭐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거창한 드라마는 아니지만, 일본이라는 사회도 참 처절한 사회여서 그런지 꽤 저런 내용을 담은 만화같은 것이 많은 것 같아 그냥 써 보았다. 

그나저나 아키야마라는 녀석. 정말 멋지다. 그 냉철함과 정확한 판단력이라니 ... 아키야마만 나타나면 두두두둥 나는 구원받았다!라는 느낌이 든다. 호리호리 마른데다가 처음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자꾸 보니 비웃는 듯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는 표정에 카리스마가 느껴지며 그 냉정함에 중독되게 되는. 아아. 아홉살 인생에 나왔던 남자 아이가 가졌던 돌쇠식 믿음직스러움과는 매우 다른 성격을 가진 믿음직스러움. 정말 바보같은 정도로 착해서 짜증을 불러 일으켰던 여주인공 옆에 서 있으니 그 후광이 더욱 빛난다. 하아. 아키야마.  

에이잉, 뭐 드라마가 재미있다는 얘기였는데.

조연들도 볼 만한 애들 몇 명 있으니 관심있는 분은 보셔도 좋겠다.

by 불안정한神 | 2007/10/31 18:43 | 흥미에 따른 책, 공연, 영화 | 트랙백 | 덧글(4)

미친키스를 보고 나서.

 

대략 2주전 미친키스를 보았다. 대학 다닐 때 미대에서 하는 공연을 본 이후 2번째 보는 공연이었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 대부분의 내용을 까먹고 있었으나, 공연을 보는 도중 새록새록 생각이 났다. 아, 저 역할이 한나가 하던 역할이구나, 저것은 임경이, 저것은 세진형이 하는 식으로. 

다시 본 미친키스는 이전에는 몰랐던 느낌들을 안겨주었다. 사실 첫 번째 미대에서 하는 미친키스에 관해서는 '무대가 깊었다'는 사실과 세진형이 감초 역할을 참 맛깔스럽게 하였다. 여동생이 마지막에 죽는다. 그리고 '발을 사랑해 달라는' 여자가 등장한다는 사실 밖에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만큼 내가 작품 이해도가 떨어졌다는 말일 것이다. 다시 본 미친키스는 27살의 나에게도 아직은 이해하지 못할 부분과 대사들이 많이 있었으나 대략 5년 전의 나보다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는 공연이었다.

 

일단 무대는 그리 깊지 않았다. 침대와, 벤치가 있는 나무와, 테이블 하나가 무대를 구성하는 대품이었다. 조광화씨 작의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육체에 집착한다. 한 길 속을 모르는 사람의 마음에 불안함을 느끼는 조광화의 남자들은 (거짓 오르가즘을 파악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즉각적인 이해가 가능하고, 그 따뜻함에 몸을 맡길 수 있는 '육체로 하는 대화'에 집착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는 너의 속을 모르겠어서, 너의 마음을 모르겠어서, 너를 가지기를 원한다고 절규한다. 남자 주인공 장정의 히드클리프 예찬은 사랑받고 싶으나 사랑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떠는 어린아이의 자해와 자기 연민적 파멸을 위한 열정의 예찬이다. 교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여주인공인 신희를 가르치고 있는 인호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느끼고 있는 몰이해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젊은 여자들을 전전하며 그들의 육체를 탐한다. 답답한 한계를 가진 남자 주인공들을 보며 조광화가 하고 싶어하는 말이 무엇일지를 한참 생각했다. 그들은 대체 연인에게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하는가.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라는 미묘한 존재에게 날카로운 안테나를 세운 채로 자신을 항상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소통이 가능한 존재를 찾고 싶다는 욕망인가. 그러면서 상대에게 무관심한 그들의 모습은 무엇인가. 거친것이 싫다고 내지르듯 말하는 신희에게 장정이 보인 반응은 무엇이었던가.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상대방을 숨막힐 듯 끌어안고 격렬한 몸부림으로 사랑을 표현해야만 상대가 만족할 것이라는 수컷들의 오래된 미신적 신념인가.  

조광화는 이 극에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의 형상화에는 실패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장정의 여동생 은정외에는 작가는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을 생략하고 있다. 여주인공 신희는 아직 직장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전공도 그저 그렇고 미래를 찾지 못한 채 대학원에 몸을 맡기고 있는, 시간을 유예하기 위한 도피성 유학을 꿈꾸고 있는 여자이다.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몰이해라는 생활의 고통을 받고 있는 인호와의 덧없는 사랑에 몸을 맡긴다. 그 이유는 나도 알 수가 없다. 신희의 선택은 적어도 나에게는 개연성 없는 것으로 보이며 그의 존재가 극에서 어떤 역할을 가지는지 (남자주인공 장정의 집착의 대상으로서 하나의 사물이 되는 것을 제외한다면) 나는 알 수가 없다.

 

장정의 여동생 은정은 모든 일에 자신이 없고, 진득하게 한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왜 못하냐는 질책에는 나는 원래 못해, 안되는걸 어떡해라며 징징대고 그럴 바에 나가 죽어버려라는 호통에는 죽을꺼야 라며 징징댄다. 오빠(장정)가 어렵사리 당선된 시나리오 덕에 받은 상금(아마 그 1회로 그친 채 다시는 당선되지 않을 가능성이 큰)을 (아무 각오 없이)어설픈 욕구로 다닌 연기학원에 모두 날리고 이를 질책하는 오빠에 대한 부담감과 자기 자신을 스스로 세우고 비끄러매는 것에 힘겨움을 느낀 나머지, 그러한 자신을 포기하고 낯선 남자의 손길에 몸을 맡기는 창녀가 되는 인물이다. 굉장히 의존적인 존재. 그녀는 인호가 자신의 공허를 지우고 죽어버린 열정을 비루한 방법으로나마 찾고 싶은 나머지 싸늘하게 식어버린 자신의 몸뚱아리에 손을 대지 말고 자신을 흥분시켜 보라는 무리한 요구를 함에도, 이에 응하여 싸구려 냄새가 나는 언어로 인호를 유혹하는 과정에서 진심으로 자신의 외로움과 끝없는 절망감을 드러내게 된다. 자신의 절망과 외로움과 맞닿아 있는 은정의 어두움을 알게 된 인호는 은정을 끌어안고 그 외로움을 달래주마 속삭이게 되고, 이 모든 정사의 과정을 장정은 그가 동생에게 설치해 놓은 도청장치를 통해  듣고 있다. 은정은 인호로
대표되는 남자들로부터 받은 돈으로 채울 수 없는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명품을 사들이고 창녀가 된 동생을 모른척 하려던 장정은
잔인한 분노를 표출하며 그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다 이윽고 칼을 집어들고 은정의 앞에서 배게의 배를 가른다.
 
인호의 부인, 영애는 언제부터 발에 대한 페티시즘을 갖게 되었을까. "내 발을 사랑해줘" 그 한마디에 어김없이 관객들은 웃었다. 관객들이 웃는 이유는 자신은 그러한 변태적 집착에서 자유롭기 때문일까, 자신또한 그 범주에 속해 있다는 자조적 웃음일까, 어색함을 무마하고자 하는 정치적 제스쳐일까, 호기심에서 비롯된 천진난만한 웃음일까. 어느 것이든 난 5년 전에도, 그리고 이번 공연에서도 관객들의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어도 그러한 측면에 있어서는 사람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어이없음'에서 비롯된 웃음. 그것이 내가 받아들인 그 웃음의 의미이다. 그녀는 극도의 외로움에서 장정이라는 인물에게 자신과의 비밀스런 만남을 남편의 사생활 조사 보고라는 허울로 가장한 채 열정적으로 임해줄 것을 주문한다. 고용주라는 이름으로. 그녀는 자신의 발을 사랑해 달라며 발목을 쭉 편채 장정의 얼굴앞에 들이밀 때부터 이미 'S' 의 자질을 표출한다. 그러한 S가 이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 인호와의 관계를 제대로 이어나갈 수 있을리 없다. 이 여인은 막의 중간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인물 X 에게 마치 여왕과 같이 자신의 발을 맡긴다. 헌신적인 구두 가게의 점원과도 같이 그녀의 발을 이 세상 대단한 보물을 대하는 양 어루만지는 X를 곁에 두고 그녀는 신희에게 절망하고 동생에게 상처받으며 자기 스스로 진실을 마주보기를 두려워하는 장정의 절규를 그 효용이 소멸한 물건을 대하듯 가볍게 거절한다. 그녀가 자신의 발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인호와 연애하던 시절, 더러운 계단 밑에서 남이 볼까하는 두려움이 남이 볼지도 모른다는 달뜬 흥분으로 모순되게 변화하는 것을 느끼며 짧고도 강렬한 정사를 가졌던 그 때, 흙탕물에 더러워진 자신의 발을 빗물로 깨끗이 씻겨주던 인호의 손길이 그 원인이었을까? 오랜 세월이 지나 날이 밝을 때 찾아가 본 그 계단의 모습이 아무리 좁고 더럽고 비루한 곳이었다고 해도 열정이라는 콩깍지가 이성을 지배하던 그 때 더러워져 아무에게도 주목을 받지 못하였을 자신의 발을 씻어주던 인호의 손길, 그 한계를 모르는 사랑의 손길이 그녀의 남은 인생을 지배하는 성적 취향의 근본이라 하여도 납득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발에 대해 집착하게 된 것이 과연 그 때였을까. 극에는 드러나지 않은 그녀의 과거, 알 수 없는 그녀의 경험이 그 근본원인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늙어만 가는 육체에 대한 두려움, 다시 살릴 수 없도록 죽어버린 남편의 열정의 불씨, 새로 만든 애인 대용품의
불성실함, 미지의 인물 X. 영애는 조광화가 그다지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지 않았지만 비교적 알기 쉽다. 그녀 또한 불쌍한 존재라는
점에선 다를 바가 없다.

 


잔인하고, 잔인하고, 극은 정점을 향해 치닫는다. 마치 굿모닝 베트남의 피와 살이 떨어져나가는 전쟁 장면에서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울려퍼지는 것처럼 마지막 비극의 장면에서 배게속의 깃털은 아름답게 흩날리고 무대의 모든 조명은 환하게 밝혀져 무대 위를 내리쬔다. 그 호흡마저 정지시킬 듯한 밝음 속에서 어설프고 뻔하게 예정되었던 오해는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장정은 미친 듯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여동생의 자살을 방관한다. 죽어버린 동생을 안고 담배를 꼬나물며 자신의 몸에 키스를 퍼붓는 장정. 이제 누가 내 몸에 키스를 해 줄 것인가. 아아. 내가 하겠다. 내가 내 몸에 키스를 하겠다. 그 독백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파멸적 인간의 혐오스런 구토이다. 그 마지막 순간에도 자기애를 버리지 못하고, 남을 보지 못하고, 자기애를 버리지 못하고, 자기 연민을 버리지 못하고. 불쌍한 것. 자기 연민의 독과 그 찌질함과, 그 함정과, 그 모순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장정의 그 모습이 너무나 불쌍해 보였다. 넌 정신적 나이가 몇 살이니?

 

서로의 관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각자가 끝없는 자기애를 표출하며 극은 끝난다. 자살도, 좌절된 사랑의 도피 행각도, 미지의 남자와의 바람도, 자신의 몸에 키스하는 것도.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자기애와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의 허무한 발악이다. 그 발악의 끝에는 관객에 대한 물음이 있다. "너는 어떻게 살고 있니?" 등장인물들의 뻔한 한계와 그 이야기 풀어내는 방식의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배우의 머리 위에서 바로 내리쬐는 조명과, 처음부터 끝까지 힘을 잃지 않는 배우들의 패기와, 비록 남성에게 좀 더 치중하기는 했지만 꽤나 적절히 배우들에게 분배된 역할의 비중이 극을 끌어가는 가장 큰 힘이라 생각하였다. 관계에 대해 난 절망하고 싶지 않다. 이 연극이 보여준 현실만이 진정한 현실은 아니니까. 게다가 또 누가 아는가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간 장정이 가장 밑바닥 진흙창으로부터 다시 한번 기어나올지. 정신 이상이라는 손쉬운 도피가 훨씬 그럴듯 하지만 말이다.


<사진 출처 : 엠뮤지컬컴퍼니>

by 불안정한神 | 2007/10/22 13:35 | 흥미에 따른 책, 공연, 영화 | 트랙백 | 덧글(0)

핑퐁, 철콘 근크리트.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 중 핑퐁과 철콘 근그리트를 보았다. 철콘 근그리트는 마치 '택시 드리벌'의 작명 센스와도 유사하게 어린 아이들이 철근 콘크리트의 발음을 잘못하는 것에 착안하여 지어진 이름이다(일본어로는 텟킨 콘크리토를 텟콘 킨크리토로 바꾼 것이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만화는 만화가들의 만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별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만화는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특히 나처럼 스토리 중심으로 만화를 읽어나가는 독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의 만화는 꽤 역동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만화에서 사실 스토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각 장면에서의 인물의 심리 상태와 그 표현법에 더욱 주목을 하며 보아야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 핑퐁의 경우 어떤 한 측면만을 놓고 이야기하면 열혈 스포츠물로 분류할 수도 있겠으나 아다치 미쯔루(H2)나 이노우에 다케히코(슬램덩크)의 작품처럼 세련된 맛을 안겨주지는 않는다. 위 작가들의 작품은 그들이 보여주는 그림과 대사만을 따라가면 독자가 쉽게 이해하며 작품에 빠져들 수 있도록 매우 친절하다. 그러나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은 그 작화만 따라가다 보면 어딘지 거칠고 불친절한 장면 장면의 연결에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는 우리가(내가) 현대적 일본 작가들의 만화와 그 영향을 받은 한국 만화가들의 작품에 굉장히 익숙해져 있는 결과일 것이다.

 사실 일본에서도 야자와 아이라던지 우라사와 나오키라던지 하는 작가들처럼 세련되고 보기 좋은 그림을 그려 내는 만화가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작년부터 내가 자주 들리는 이글루스의 한 블로그가 있는데, 그곳의 주인장은 일본의 옛 만화작품들(60년대 70년대)을 변역해서 제공하고 있다. 그 작품들은 깔끔하고 정교한 그림체로 어떠한 스토리를 전달하는데에 치중하기 보다는 실험적인 컷 구성, 풍부한 감정을 담고 있는 그림체, 간결하고 미학적인 표현방식들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만화는 제9의 예술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작품들이랄까. 어렵고 난해하고 무언가 있는 것처럼 보여야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표현 방식은 정말로 미학적이다. 함축적이고.

 

 여튼 위 두 작품은 한 번 읽기를 끝냈지만 다음에 다시 찬찬히 각 장면에 그려져 있는 사물들과 인물들을 곰곰히 뜯어보며 제대로 된 감상의 시간을 가져도 좋을 작품들이다. 아무래도 첫 번째 읽을 때는 내 습관을 버리지 못해 스토리를 따라가며 읽었지만 두 번째 읽을 때는 좀 다르지 않겠나. 다만 새 만화책을 읽을 때는 병적으로 깨끗하게 보존하며 읽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라 그림을 충분히 감상할 만큼 책을 펼치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2개의 작품이 남았다는 사실이 기분좋구나.

by 불안정한神 | 2007/10/22 09:51 | 흥미에 따른 책, 공연, 영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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