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22일
미친키스를 보고 나서.
대략 2주전 미친키스를 보았다. 대학 다닐 때 미대에서 하는 공연을 본 이후 2번째 보는 공연이었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 대부분의 내용을 까먹고 있었으나, 공연을 보는 도중 새록새록 생각이 났다. 아, 저 역할이 한나가 하던 역할이구나, 저것은 임경이, 저것은 세진형이 하는 식으로.
다시 본 미친키스는 이전에는 몰랐던 느낌들을 안겨주었다. 사실 첫 번째 미대에서 하는 미친키스에 관해서는 '무대가 깊었다'는 사실과 세진형이 감초 역할을 참 맛깔스럽게 하였다. 여동생이 마지막에 죽는다. 그리고 '발을 사랑해 달라는' 여자가 등장한다는 사실 밖에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만큼 내가 작품 이해도가 떨어졌다는 말일 것이다. 다시 본 미친키스는 27살의 나에게도 아직은 이해하지 못할 부분과 대사들이 많이 있었으나 대략 5년 전의 나보다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는 공연이었다.
일단 무대는 그리 깊지 않았다. 침대와, 벤치가 있는 나무와, 테이블 하나가 무대를 구성하는 대품이었다. 조광화씨 작의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육체에 집착한다. 한 길 속을 모르는 사람의 마음에 불안함을 느끼는 조광화의 남자들은 (거짓 오르가즘을 파악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즉각적인 이해가 가능하고, 그 따뜻함에 몸을 맡길 수 있는 '육체로 하는 대화'에 집착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는 너의 속을 모르겠어서, 너의 마음을 모르겠어서, 너를 가지기를 원한다고 절규한다. 남자 주인공 장정의 히드클리프 예찬은 사랑받고 싶으나 사랑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떠는 어린아이의 자해와 자기 연민적 파멸을 위한 열정의 예찬이다. 교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여주인공인 신희를 가르치고 있는 인호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느끼고 있는 몰이해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젊은 여자들을 전전하며 그들의 육체를 탐한다. 답답한 한계를 가진 남자 주인공들을 보며 조광화가 하고 싶어하는 말이 무엇일지를 한참 생각했다. 그들은 대체 연인에게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하는가.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라는 미묘한 존재에게 날카로운 안테나를 세운 채로 자신을 항상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소통이 가능한 존재를 찾고 싶다는 욕망인가. 그러면서 상대에게 무관심한 그들의 모습은 무엇인가. 거친것이 싫다고 내지르듯 말하는 신희에게 장정이 보인 반응은 무엇이었던가.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상대방을 숨막힐 듯 끌어안고 격렬한 몸부림으로 사랑을 표현해야만 상대가 만족할 것이라는 수컷들의 오래된 미신적 신념인가.
조광화는 이 극에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의 형상화에는 실패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장정의 여동생 은정외에는 작가는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을 생략하고 있다. 여주인공 신희는 아직 직장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전공도 그저 그렇고 미래를 찾지 못한 채 대학원에 몸을 맡기고 있는, 시간을 유예하기 위한 도피성 유학을 꿈꾸고 있는 여자이다.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몰이해라는 생활의 고통을 받고 있는 인호와의 덧없는 사랑에 몸을 맡긴다. 그 이유는 나도 알 수가 없다. 신희의 선택은 적어도 나에게는 개연성 없는 것으로 보이며 그의 존재가 극에서 어떤 역할을 가지는지 (남자주인공 장정의 집착의 대상으로서 하나의 사물이 되는 것을 제외한다면) 나는 알 수가 없다.

잔인하고, 잔인하고, 극은 정점을 향해 치닫는다. 마치 굿모닝 베트남의 피와 살이 떨어져나가는 전쟁 장면에서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울려퍼지는 것처럼 마지막 비극의 장면에서 배게속의 깃털은 아름답게 흩날리고 무대의 모든 조명은 환하게 밝혀져 무대 위를 내리쬔다. 그 호흡마저 정지시킬 듯한 밝음 속에서 어설프고 뻔하게 예정되었던 오해는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장정은 미친 듯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여동생의 자살을 방관한다. 죽어버린 동생을 안고 담배를 꼬나물며 자신의 몸에 키스를 퍼붓는 장정. 이제 누가 내 몸에 키스를 해 줄 것인가. 아아. 내가 하겠다. 내가 내 몸에 키스를 하겠다. 그 독백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파멸적 인간의 혐오스런 구토이다. 그 마지막 순간에도 자기애를 버리지 못하고, 남을 보지 못하고, 자기애를 버리지 못하고, 자기 연민을 버리지 못하고. 불쌍한 것. 자기 연민의 독과 그 찌질함과, 그 함정과, 그 모순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장정의 그 모습이 너무나 불쌍해 보였다. 넌 정신적 나이가 몇 살이니?
서로의 관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각자가 끝없는 자기애를 표출하며 극은 끝난다. 자살도, 좌절된 사랑의 도피 행각도, 미지의 남자와의 바람도, 자신의 몸에 키스하는 것도.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자기애와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의 허무한 발악이다. 그 발악의 끝에는 관객에 대한 물음이 있다. "너는 어떻게 살고 있니?" 등장인물들의 뻔한 한계와 그 이야기 풀어내는 방식의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배우의 머리 위에서 바로 내리쬐는 조명과, 처음부터 끝까지 힘을 잃지 않는 배우들의 패기와, 비록 남성에게 좀 더 치중하기는 했지만 꽤나 적절히 배우들에게 분배된 역할의 비중이 극을 끌어가는 가장 큰 힘이라 생각하였다. 관계에 대해 난 절망하고 싶지 않다. 이 연극이 보여준 현실만이 진정한 현실은 아니니까. 게다가 또 누가 아는가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간 장정이 가장 밑바닥 진흙창으로부터 다시 한번 기어나올지. 정신 이상이라는 손쉬운 도피가 훨씬 그럴듯 하지만 말이다.
# by | 2007/10/22 13:35 | 흥미에 따른 책, 공연, 영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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